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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비상금 암호 ‘이천쌀 싸가지’

“어머!”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졌다. 1년 넘게 손대지 못했던 습작 노트를 퇴고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대학교 앨범 속에 숨겨두었던 열쇠를 꺼내 나만의 보물창고를 열었다. 몇 권을 꺼내자 가장 안쪽에 꽂혀 있던 빨간 다이어리가 힘없이 쓰러졌다. 개인정보와 가끔 되새겨야 할 말들이 적힌 다이어리였다.     한 손으로 집어드는 순간,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하얀 봉투가 툭 떨어졌다. 놀라 뒤로 젖히는 바람에 무릎 위 노트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봉투부터 집어들었다. ‘Bank of America’의 로고가 선명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고 내 심장만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놀람은 곧 감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봉투를 다이어리 사이에 다시 끼워 넣고 품에 안은 채 내 방으로 올라와 문을 잠갔다. 이 은행과 거래한 적이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마치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후 집안 구석에서 발견되는 검정 비닐봉지 속 현금처럼. 나도 그 전철을 밟고 있는 듯했다.     봉투는 테이프로 겹겹이 밀봉되어 있었고, 가운데엔 검은 펜으로 X표시가 되어 있었다. 손톱으로는 뜯기 어려워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안에는 백 달러짜리 푸른빛 신권이 들어 있었다. 향긋한 잉크 냄새가 퍼졌고, 손끝으로 지폐를 넘기니 정확히 20장, 2000달러였다.     ‘어떻게 이 돈을 잊고 있었지?’ 기억하고 있었다면 보관이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방치였다. 출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지만 다이어리를 넘긴 지 1분도 안 되어 단서를 발견했다.     암호였다. 〈2020년 9월 이천쌀 싸가지〉     ‘이천쌀’은 2000달러, ‘싸가지’는 프리랜서 시절 수퍼바이저 K였다. 외국인 직원에겐 까칠했지만 나에겐 유독 친절했던 그녀. 팬데믹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수고했다며 내민 보너스였다.     ‘싸가지’는 그녀를 단번에 기억하게 하는 암호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렌트비로는 부족했고 식비로 쓰기엔 아까웠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로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바닥엔 습작 노트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잠시 하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노트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들어올려 품에 안으며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나한텐 너희가 최고의 보물이야.” 박하영 / 수필가이아침에 비상금 이천쌀 이천쌀 싸가지 비상금 암호 습작 노트들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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